영웅 없는 전쟁터, 그들이 진짜 싸워야 했던 이유 : 영화 <고지전 (2011)> 리뷰

“전쟁은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야. 살아남는 게 목적이지.”

매년 6월 호국보훈의 달이 다가오면 텔레비전에서는 수많은 전쟁 영화를 틀어준다.

보통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용감한 영웅들이 적을 멋지게 물리치는 가슴 뜨거운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2011년에 개봉한 장훈 감독의 영화 <고지전>은 그런 화려한 전쟁 영웅 영화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영화는 1950년에 시작된 한국전쟁이 끝을 향해 가던 1953년을 배경으로 한다.

남과 북의 윗선들이 휴전 협정을 맺네 마네 하며 탁상공론을 벌이던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지도 위 1cm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최전방 산봉우리에서 벌어졌던 지옥 같은 소모전을 묵묵히 비춘다.

적을 무찌르는 쾌감 대신, 무의미한 살육 속에서 미쳐가야 했던 평범한 청년들의 비극을 마주하고 나면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고지전 영화 포스터 이미지로, 전장 한가운데 선 두 병사의 강한 시선과 뒤편 전투 장면을 함께 배치해 전우애와 전쟁의 비극을 동시에 보여주는 메인 비주얼
출처: tmdb

지도 위 1cm를 위한 끝없는 생지옥, 애록고지

방첩대 중위인 은표(신하균)는 최전방 ‘애록고지’에서 아군을 쏘고 북한과 내통하는 스파이가 있다는 의심을 받고 그곳으로 파견을 나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부대원들의 모습은 은표의 상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부대원들은 춥고 배고픈 건 기본이고, 하루에도 주인이 몇 번씩 바뀌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매일 똑같은 산기슭을 기어오르며 시체 더미 위에서 싸우고 있었다. 윗선에서는 “고지를 탈환하라”는 명령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 정작 총알이 빗발치는 산 위로 올라가 짐승처럼 뒹굴고 피를 흘려야 하는 건 스무 살 남짓한 앳된 청년들뿐이다. 이념이나 애국심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고, 오직 ‘오늘 하루 살아남아야 한다’는 동물적인 본능만 남은 전쟁터의 모습이 무섭도록 생생하게 펼쳐진다.

고지전 영화 스틸 이미지로, 한국전쟁 최전선 참호에 엎드린 병사들이 소총을 든 채 적의 움직임을 경계하며 긴장감 넘치는 전투 순간을 보여주는 장면
출처: tmdb

살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친구

은표는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죽은 줄 알았던 친구 수혁(고수)과 재회한다. 전쟁 초반만 해도 총소리에 벌벌 떨던 순둥이 대학생 수혁은, 피도 눈물도 없이 부대원들을 지휘하고 적을 죽이는 무자비한 괴물이 되어 있었다.

어디 그뿐일까. 중대를 이끄는 어린 대위(이제훈)는 부대원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에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매일 모르핀(마약성 진통제)을 맞으며 버티고 있다. 처음엔 왜 저렇게까지 독해졌을까 싶었던 부대원들의 사연이 하나둘 밝혀질 때마다, 그들을 괴물로 만든 건 북한군이 아니라 멈추지 않는 전쟁 그 자체였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게 된다.

고지전 영화 스틸 이미지로, 숲속을 이동하던 병사들이 총을 든 채 주변을 살피며 적의 기습 가능성에 대비하는 긴박한 수색 장면
출처: tmdb

고지 아래 비밀 상자, 우리가 싸우는 진짜 이유

영화에서 가장 기가 막히고 슬픈 설정은 남북한 군인들이 뺏고 뺏기는 고지 한가운데에 묻어둔 ‘비밀 상자’다. 어제는 남한군이, 오늘은 북한군이 번갈아 고지를 점령하다 보니, 그들은 땅속 비밀 공간을 통해 서로의 가족에게 보낼 편지나 성냥, 담배와 술을 몰래 주고받는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죽여야 하는 적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다들 고향에 남겨둔 가족을 그리워하고 살아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똑같이 평범하고 불쌍한 청춘들일 뿐이다. 북한군 장교(류승룡)가 은표에게 내뱉는 “처음엔 우리가 왜 싸우는지 알았는데,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어”라는 자조 섞인 대사는 이 끔찍한 전쟁의 허무함을 가장 완벽하게 요약해 준다.

고지전 영화 포스터 이미지로, 군모를 쓴 병사의 얼굴 클로즈업을 중심으로 전쟁의 피로와 냉혹한 감정을 강조한 한국 전쟁 영화 비주얼
출처: tmdb

호국보훈의 달, 마지막 12시간을 기억하며

결말에 이르러 마침내 휴전 협정이 맺어지지만, 발효되기까지 12시간이라는 시간이 남는다. 남과 북의 지휘부는 마지막 1초까지 영토를 넓히라며 병사들을 다시 한번 고지로 몰아넣는다. 이미 끝난 전쟁에서, 그저 지도 위 선 하나를 조금 더 밀어 올리기 위해 수많은 청년이 마지막 남은 안개 낀 산등성이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다.

6월 호국보훈의 달. 우리가 지금 너무나 당연하고 평화롭게 걷고 있는 이 길은, 70여 년 전 영문도 모른 채 산봉우리에 올라 가족을 그리워하며 스러져갔던 수많은 젊음의 핏값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단순히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 슬픈 죽음들을 우리가 결코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묵직한 숙제를 남긴다.

고지전 영화 스틸 이미지로, 위장복과 저격 장비를 갖춘 병사가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목표를 주시하며 숨 막히는 긴장감을 형성하는 장면
출처: tmdb

지금 당장 재생 버튼을 눌러야 할 사람들

멋진 영웅들의 통쾌한 전투 장면을 기대하거나 화려한 전쟁 액션을 찾는 분들에게는 이 영화가 너무 무겁고 우울하게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이번 6월, 교과서 속에 박제된 건조한 역사 대신 그 시절 차가운 흙바닥을 뒹굴어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피눈물 나는 진짜 얼굴을 마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영화를 봐야 한다.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는 물론이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만큼 깊고 먹먹한 감동을 선사할 최고의 전쟁 영화다.

고지전 영화 스틸 이미지로, 흙먼지와 폭발 흔적이 가득한 전장에서 여러 병사들이 뒤를 돌아보며 혼란과 생존 본능이 교차하는 전쟁 한복판의 분위기를 담은 장면
출처: tmdb

지옥 같은 고지전 속에서 괴물이 되어가면서도 끝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이름 없는 청춘들의 희생을 보았다면, 반대편에는 그로부터 30여 년 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민주주의라는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피 흘렸던 또 다른 청춘들의 뜨거운 기록이 있다. 당연하지 않았던 것을 당연하게 만들기 위해 기꺼이 희생했던 1987년의 벅찬 릴레이가 궁금하다면. 👉 [1987: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거짓말이 깨운 위대한 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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