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개기월식까지 안드로메다 왕자를 만나지 못하면 지구는 끝이야!”
2003년에 개봉한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는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기발하고, 가장 슬프며, 가장 완벽하게 미쳐있는(좋은 의미로) 영화로 손꼽힌다.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황당하다. 외계인의 텔레파시를 막겠다며 장난감 헬멧을 쓴 청년 병구(신하균)가 화학회사 대표 강 사장(백윤식)을 안드로메다 외계인이라고 굳게 믿고 납치해 지하실에 가둔다는 이야기다.
개봉 당시에는 포스터만 보고 가벼운 코미디 영화인 줄 알았던 관객들이 영화의 엄청난 전개에 놀라 흥행에는 쓴맛을 봤다. 하지만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 이 작품은 수많은 영화 덕후들이 입을 모아 찬양하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천재적인 걸작’으로 남아있다.

물파스와 때수건으로 완성한 환장의 고문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병구가 외계인(?) 강 사장을 심문하는 기상천외한 방식에 있다. 할리우드의 첨단 장비 따위는 없다. 병구는 파리채, 이태리 때수건, 그리고 물파스라는 아주 친숙하고 생활 밀착형(?) 아이템들로 강 사장을 괴롭힌다.
외계인은 피부가 약하다며 때수건으로 살갗을 벅벅 문지르고 그 위에 물파스를 발라버리는 끔찍하면서도 웃긴 상황. 이 황당한 지하실에서 벌어지는 두 배우의 연기 차력쇼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 신하균(병구): 눈을 희번덕거리며 외계인 이론을 줄줄 읊는 신하균의 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순진한 청년의 얼굴을 하다가도, 순식간에 잔인하고 섬뜩한 광기를 내뿜는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저 사람 진짜 미친 거 아니야?”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백윤식(강 사장): 영문도 모른 채 지하실에 묶여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특유의 거만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자신을 괴롭히는 병구를 오히려 어르고 달래며 탈출을 시도하는 능청스러운 연기는 극의 재미를 멱살 잡고 끌고 간다.

웃기다가 울리는, 맵고 짠 한국형 블랙 코미디
영화를 보며 킥킥대다 보면 중간중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어라? 강 사장이 진짜 외계인이면 어떡하지?”라며 병구의 황당한 뇌피셜에 은근슬쩍 설득당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감독이 진짜 보여주고 싶었던 건 외계인의 정체가 아니었다. 극 후반부로 갈수록 병구가 왜 이렇게 헬멧을 쓰고 지구를 지키는 데 집착하게 되었는지, 그의 슬픈 과거가 하나씩 밝혀진다.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라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에게 맞고 상처받았던 병구.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잔인한 현실을 맨정신으로 견딜 수 없어서, 차라리 “나를 괴롭힌 건 다 외계인 탓이야!”라고 믿어버린 한 남자의 짠한 핑계였던 셈이다.
황당한 코미디로 시작해서, 땀 쥐게 하는 스릴러를 거쳐, 마지막엔 가슴을 쾅 치는 진한 여운까지. 여러 장르를 롤러코스터처럼 넘나드는 솜씨가 정말 기가 막힌다.

지금 당장 재생 버튼을 눌러야 할 사람들
뻔한 결말로 끝나는 그저 그런 영화들에 질려버렸다면.
물파스 냄새가 코를 찌르는 듯한 좁은 지하실에서, 신하균과 백윤식이라는 두 괴물 같은 배우가 뿜어내는 에너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118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갈 것이다. 보고 나면 왜 이 영화가 20년째 한국 영화계의 전설로 불리는지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헬멧과 물파스로 무장한 짠내 나는 청년의 아주 황당하고 슬픈 납치극을 보았다면, 반대편에는 이 기발한 뼈대를 그대로 가져가 할리우드의 힙한 시골집 지하실로 옮겨온 매력적인 리메이크작이 있다. 장준환 감독의 거친 에너지가 엠마 스톤과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을 만나 어떻게 세련된 블랙 코미디로 탈바꿈했는지 궁금하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