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이동진 평론가의 시선으로 본 나홍진 감독의 신작 <호프(HOPE)> 리뷰

“달려야 한다.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게 달리는 방법밖에 없다.”

나홍진 감독이 무려 10년 만에 신작 <호프(HOPE)>로 돌아왔다.

한국 영화계에서 늘 불안한 도전으로 여겨졌던 SF 장르를, 그야말로 최대 다수를 겨냥한 압도적인 대작으로 완성해 낸 감독의 역량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죽은 소 한 마리를 확인하러 가는 조용한 아침으로 시작한 영화는, 단 한 번도 엑셀에서 발을 떼지 않고 거대한 우주적 참극으로 내달린다. 두 시간 반이 넘는 러닝타임 내내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이 엄청난 걸작 속 숨겨진 의미와 해석들을 가볍게 파헤쳐 보자.

차량 문 뒤에 몸을 숨긴 채 소총을 겨누는 여성 경찰관 정호연의 영화 호프 총격 장면.
출처: tmdb

1. 백주 대낮에 드러낸 미친 액션의 향연

이 영화는 전체 분량의 약 70%가 액션으로 채워져 있을 만큼 양과 질 모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마을, 숲, 그리고 마지막 언덕길까지 거대한 세 개의 액션 시퀀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공간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의 액션을 변주해 낸다.

특히 놀라운 것은 장르적 문법을 깨부순 나홍진 감독의 자신감이다.

보통 미지의 괴물이나 외계인이 등장하면 밤이나 어두운 실내를 배경으로 정체를 숨기며 긴장감을 유발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호프>는 아침에 해가 뜰 때 시작해 해가 질 때 끝나는 단 하루 낮 동안의 이야기다.

화창한 대낮에 모든 것을 정면으로 다 보여주면서도 조마조마한 서스펜스를 완벽하게 유지해 낸다.

광각 렌즈와 로우 앵글을 활용한 현란한 카메라 워크는 이 영화가 한국 액션 영화에 얼마나 놀라운 족적을 남겼는지 증명한다.

낡은 건물 벽에 몸을 숨긴 채 장총을 들고 경계하는 경찰관 황정민의 영화 호프 장면.
출처: tmdb

2. 무지하고 무능한 인간, 나홍진의 세계관

주인공 범석(경찰)의 캐릭터 설정은 나홍진 감독이 인간을 바라보는 뼈아픈 시선을 정확히 대변한다.

범석은 겉으로는 터프해 보이지만 실상은 외계인을 가장 무서워하고 마을 사람들조차 그를 우습게 여기는 무능한 인물이다.

심지어 총기에 능숙한 마을 노인들이 그에게 M16을 쥐여주며 “쏠 줄 알아?”라고 물어볼 정도다.

그는 극 중에서 정보량이 가장 적으며, 진실은 믿지 않고 거짓말(호랑이 소문 등)에만 헛발질을 하는 무지한 존재로 그려진다.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필사적으로 행동하다가 결국 어긋난 비극을 맞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추격자>, <곡성>에 이어 <호프>까지 관통하는 나홍진 감독 특유의 묵직한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서리가 낀 유리창 너머로 건물 내부를 살펴보는 두 남성의 어두운 영화 호프 장면.
출처: tmdb

3. 사냥꾼과 사냥감의 역전, 엇갈리는 시선

영화의 중반부, 숲에서 외계인의 우주선을 발견하는 사건을 기점으로 이야기는 완벽한 변곡점을 맞이한다.

그 이전까지는 인간들이 괴물(외계인)을 찾아 퇴치하려는 구도였다면, 이후부터는 외계인들이 인간을 추적하며 인간이 사냥감으로 전락해 버린다.

이 과정에서 감독은 관객이 이입하는 대상을 교묘하게 뒤바꾼다. 초반에는 외계인을 퇴치해야 할 짐승처럼 묘사하지만, 중반 이후부터 외계인들에게 ‘자막’을 제공하고 그들의 ‘시점 숏’을 부여하며 그들을 주체적인 존재로 끌어올린다.

이들의 대조는 캐릭터 묘사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 외계인: 명확한 직급 체계가 있고, 목적을 위해 행동하며, 아이(아기 외계인 칼리)를 보호하려는 고귀하고 우아한 존재들이다.
  • 인간: 시종일관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고, 끊임없이 배설과 관련된 모습이 부각되는 비천한 존재로 묘사된다. 인간 측에는 아동 캐릭터조차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잿빛 구름 사이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산악 지대 위를 비행하는 거대한 우주선이 담긴 영화 호프 장면.
출처: tmdb

4. 결말 해석: ‘호프(HOPE)’는 인간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가장 소름 돋는 지점은 영화의 결말과 제목의 역설이다.

후반부, 외계인들을 구출하러 온 거대한 함선마저 오작동으로 폭파되는 우주적 비극이 벌어진다.

이 거대한 참사 앞에서 인간과 외계인은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한다.

인간들(범석 등)은 끝까지 이 상황이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무기력하게 내달릴 뿐이며, 동료의 죽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조차 “입 아파”라며 묵살해 버린다.

반면 외계인(마베이오)은 유일한 구원의 희망이 사라진 절망 속에서도, 기어코 죽은 아기 외계인 칼리를 살려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며 자신의 심장까지 꺼내어 맹세한다.

영화 초반부, 마치 이성이 없는 듯 무차별적으로 인간을 도축하던 외계인들의 모습은 아마 칼리의 죽음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는 과정이 아닐까 싶었다.

반면, 맹목적으로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칠 뿐인 인간들에게는 어떠한 희망도 남아있지 않다.

영화의 제목 <호프(HOPE)>는 철저하게 외계인의 시점에서 그들이 품은 숭고한 의지와 희망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포스터 타이틀 아트 또한 외계인의 심장 컬러를 닮았다.

깊은 숲과 거대한 눈 형상을 배경으로 홀로그램 효과의 제목이 배치된 영화 호프 한국 포스터.
출처: tmdb

💡 관람 팁 & 쿠키 영상 안내

이 압도적인 마스터피스는 극장에서 봐야만 그 진가를 100% 느낄 수 있다. 대낮의 숲과 끝없는 언덕길을 내달리는 사운드 믹싱이 일품이므로 반드시 특별관 관람을 추천한다.

  • 쿠키 영상: 영화의 여운이 모두 끝난 후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면 쿠키 영상이 존재한다. 충격적인 결말의 여운을 곱씹으며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시길! (아주 단단한…)
울창한 숲속에서 소총을 겨누며 주변을 경계하는 청재킷 차림 조인성의 영화 호프 장면.
출처: t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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