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에서 왕을 빚어낸 사내
역사극에 등장하는 한명회는 대개 음흉한 모사꾼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이 증명하는 실제의 그는 단순한 악당을 넘어선, 조선 왕조의 뼈대를 뒤흔들고 재조립한 냉혹하고 천재적인 ‘권력의 설계자’였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내용인 단종의 비극이 서려 있는 영월 청령포의 서늘한 바람은 결국 그의 붓 끝에서 시작되었다.
수양대군을 왕좌에 앉히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거머쥐었지만, 그가 쌓아 올린 40년의 철옹성은 사후 ‘부관참시(剖棺斬屍)’라는 잔혹한 형벌 앞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이 글은 피비린내 나는 살생부로 시작해 파헤쳐진 무덤으로 끝이 난, 한 인간의 기형적인 권력욕과 그 핏빛 허망함에 대한 기록이다.
살생부(殺生簿), 피로 쓴 권력의 서막
1453년(단종 1년), 조선의 역사를 바꾼 계유정난의 밤. 수양대군의 칼잡이들이 김종서를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을 척살할 때, 그 광기의 한가운데서 생살(生殺)의 명부를 쥐고 있던 자가 바로 한명회였다.
그는 사전에 치밀하게 작성된 ‘살생부’를 들고 궁궐 문턱에 섰다. 살려둘 자는 들여보내고, 죽일 자는 문밖에서 철퇴로 내리쳤다.
명분 없는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한명회 특유의 잔혹하리만치 차가운 이성과 결단력 덕분이었다. 가장 낮은 말단 관직(경덕궁직)을 맴돌던 불우한 사내는, 그날 밤 타인의 피를 징검다리 삼아 조선의 가장 높은 곳으로 도약했다.
압구정(狎鷗亭), 갈매기를 벗 삼기엔 너무 무거웠던 욕망
세조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한명회는 두 딸을 예종과 성종의 정비(왕비)로 바치며 임금의 장인으로서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권력의 정점에 선 그가 한강 변에 지은 정자의 이름이 바로 지금의 강남 압구정동의 유래가 된 ‘압구정(狎鷗亭)’이다.
‘세상일은 잊고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이었으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의 정자는 권력을 탐하는 자들의 뇌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심지어 말년에는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을 압구정에서 대접하겠다며, 임금만 쓸 수 있는 ‘용봉차일(왕실의 천막)’을 요구하는 오만함을 보였다.
결국 이 무리수는 성종의 분노를 사서 그의 정치적 입지를 좁히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갈매기를 벗 삼기엔, 그의 몸통에 들러붙은 권력의 탐욕이 너무 무거웠다.
죽은 자의 목을 베다, 부관참시의 허망함
1487년, 한명회는 73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눈을 감았다.
살아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을 누렸고, 죽어서는 왕의 묘정에 배향되는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자신이 설계한 권력의 요새가 영원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복수는 죽음 뒤에 찾아왔다.
17년이 지난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의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사(賜死) 사건을 들춰내며, 당시 조정의 핵심 당상관이었던 한명회의 무덤을 파헤치라는 어명을 내린다.
부관참시(剖棺斬屍). 무덤 속 관을 쪼개고, 이미 백골이 된 시신의 목을 잘라 한양 저잣거리에 내걸었다. 왕을 만들고, 왕의 장인이 되었으며, 40년간 조정을 쥐락펴락했던 대권력자의 최후 치고는 너무나도 참담하고 허망한 결말이었다. 생사를 가르는 살생부를 작성했던 손아귀의 힘은, 파헤쳐진 흙구덩이 속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승자의 그림자와 패자의 빛
가장 치밀한 모사꾼이었던 한명회의 육신은 갈가리 찢겨 역사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반면, 그가 몰아냈던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던 이름 없는 말단 호장 엄흥도의 이름은 충절의 상징이 되어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청령포의 숲을 지키고 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권력을 쥐었던 자는 무덤조차 온전치 못했고, 가장 낮은 곳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존엄을 지켰던 자는 영원한 안식처를 얻었다.
권력의 수명은 한 인간의 탐욕을 채우기엔 턱없이 짧지만, 인간이 지켜낸 가치의 수명은 역사를 관통하여 살아남는다. 부관참시 당한 한명회의 텅 빈 무덤이 우리에게 남긴 서늘하고도 묵직한 교훈이다.
💡 한명회가 설계한 비극의 끝, 그곳에 남은 자의 기록
권력의 최정점에 선 한명회의 펜 끝이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때, 그 피 묻은 역사의 뒤처리를 감당한 것은 가장 낮은 곳의 관원이었다. 한명회와 완벽한 대척점에 섰던 패자의 묵직한 기록이 궁금하다면 아래 칼럼을 권한다.
👉 [단종의 마지막 유배지 청령포, 그리고 호장 엄흥도의 숨겨진 기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