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그랬다고 적었다» 리뷰 | 말을 잃어가는 아버지와 똑똑해지는 AI 사이에서

말을 잃어가는 사람과 점점 똑똑해지는 AI 사이에서

한 사람은 기억과 말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언어 능력이 날마다 발전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김애란은 이 두 존재를 나란히 두고 글을 묶었다. 아버지와 AI.

이 대비를 알고 책장을 넘기면, 담담해 보이던 문장들이 다르게 읽힌다.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을 비롯해 프랑스 리나페르쉬상까지 받은 작가다.

화려한 이력을 나열하고 시작하는 게 조금 멋쩍긴 하지만, 그런 이력을 다 쌓은 사람이 7년 만에 다시 꺼낸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낮고 조심스럽다는 게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작가가 작정하고 슬픔을 꺼내 보이는 문장은 거의 없다. 오히려 정반대다.

아버지 이야기를 쓰면서도 그는 품위와 예의를 지킨다.

바쁘게 스쳐 지나가던 얼굴을, 병을 계기로 다시 한번 깊이 들여다보게 됐다는 것. 그 정도의 온도로만 말한다.

그런데 그 절제가 오히려 더 오래 남는다.

큰 소리로 울지 않는 사람 옆에서 괜히 내가 더 마음이 쓰이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작가의 말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10여 년 전 어느 산문에서 “시간은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는데, 그때는 서른 몇 살의 나름대로 답을 적어 넣었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삶은 여전히 같은 질문을 다른 얼굴로 던져온다고 그는 쓴다.

이 책 1부는 그 얼굴들 중 하나, 말과 기억을 잃어가는 한 사람과 매일 더 유창해지는 프로그램을 대비시켜 묶은 글들이라고 스스로 설명한다.

그러면서 덧붙인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무지’라는 구멍 난 그물을, ‘논리’와 ‘방어’로 촘촘히 메워 매끈한 말로 만들지는 않기로 했다는 다짐이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는 것, 흔들리는 채로 그 흔들림을 그대로 적는 것.

이 산문집 전체가 그 다짐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AI 이야기는 1부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 드러내고 다 털어놓는 대신 감추는 마음, 그리고 그 감춰진 것을 알아채고 헤아리는 마음. 작가는 AI 앞에서 요즘 그런 마음을 자주 생각한다고 썼다.

문학이라는 장르는 AI와 정반대로, 자신의 무지를 길고 다양한 방식으로 고백해온 장르가 아니었을까 하는 문장도 있었다.

모든 걸 아는 척하는 기술과 달리, 문학은 모른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는 행위라는 것.

AI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을 내놓지만 인간은 망설인다는 말을 작가가 예전 인터뷰에서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정답을 빨리 내놓는 것과, 모른다는 사실 앞에서 오래 머무는 것.

이 책은 후자 쪽에 서서, 그 머뭇거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창작자로서의 고백도 인상적이었다.

글을 쓰다 보면 예술과도, 생활과도 딱히 상관없어 보이는 순수한 상태로 잠깐 고양되는 순간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게 자신을 위대하게 만들어주진 않아도 맑게는 만들어준다고.

시간 대비 수지가 전혀 맞지 않는 이 작업에 사람들이 그토록 오래 매달리는 이유가 어쩌면 바로 그 잠깐의 순간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문장 앞에서, 뭔가를 오래 만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을 대하는 시선에서도 비슷한 조심스러움이 느껴진다.

누군가 내뱉은 말 한마디로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는 문장이 있었다.

그 사람이 하는 말과 그 사람 자체는 생각보다 상관없는 경우가 많다고.

코로나를 지나온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문장도 있었다.

타인에게 실망하고 타인이 지겨우면서도 결국 타인을 그리워하고, 오랜만에 만나 고작 이런 거였나 허무해하다가도 다시 그 타인 덕분에 일어서는 날들.

이 책이 3부에서 다루는 팬데믹의 기억도 결국 이 모순된 마음의 다른 버전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사랑스러웠던 대목은 따로 있다.

중학교 1학년,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반 친구들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던 기억이다.

어디선가 읽은 얼굴 없는 귀신 이야기였는데, 교실 안을 가득 채운 집중의 에너지를 느끼며 이야기의 완급을 조절하다가, 절정에 이르러 친구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다는 것.

그 순간의 이야기가 주는 희열과 권력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듣는 쾌락과 말하는 쾌락이 일치하는 그 느낌에 여전히 휘둘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고 그는 적었다.

이 한 장면이 작가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다른 어떤 설명보다 도움이 됐다.

이야기를 다루는 사람은 결국 그 힘을 처음 느꼈던 순간을 평생 쫓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3부로 넘어가면 시선이 한결 낮아진다.

2020년, 다들 하늘을 올려다보며 부분일식을 지켜봤던 어느 하루에 대한 기억도 있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는데, 돌이켜보면 삶에서 중요했던 평범한 하루였다는 문장 앞에서 나도 모르게 내 하루들을 떠올렸다.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그냥 하늘을 함께 올려다봤다는 것만으로 남는 기억도 있다는 걸 이 책은 알고 있었다.

책을 덮으며 남은 건, 한 사람의 무게란 한 시절 이뤄낸 성취가 아니라 그 사람의 평생에 걸친 모순과 결함, 실패와 헤맴까지 다 합쳐서 재어진다는 문장이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제목은 완성된 기록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느꼈고, 때로는 그렇게 틀렸다는 것까지 솔직하게 적어두는 일.

요란하게 위로하지 않으면서도, 다 읽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데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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