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믿던 상식이 무너진 자리에서 마주한 위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뷰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세계의 규칙이 사실은 누군가의 편견으로 조립된 허상이라면 어떨까.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과학 교양서가 아니다.

이 책은 한 위대한 어류학자의 평전으로 위장한 채 다가와, 독자가 평생토록 굳게 믿어왔던 상식과 분류의 체계를 밑바닥부터 산산조각 내버리는 경이로운 고백록이다.

푸른 바닷속을 배경으로 인어처럼 헤엄치는 인물과 물고기들이 떠 있고, 상단에 제목이 배치된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어판 표지 이미지.
출처 : yes24

혼돈 앞에서의 집념, 데이비드 스타 조던

이 책은 19세기 미국의 위대한 어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따라가며 시작된다.

그는 인류가 발견한 물고기의 상당수를 직접 명명하고 분류했던, 자연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학자였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시의 일화다.

평생을 바쳐 수집한 물고기 표본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이름표가 뒤섞인 절망적인 상황.

하지만 그는 포기하는 대신 직접 바늘을 들고 물고기의 살갗에 이름표를 꿰매기 시작한다.

삶이 무너진 것 같은 순간에도 다시 일어서는 이 강렬한 집념은, 인생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던 저자 룰루 밀러에게 묘한 위안과 매력으로 다가온다.

혼돈 앞에서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 사람의 비결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과학의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 우생학

하지만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간다.

자연을 계층으로 나누고 우열을 가리려 했던 조던의 분류학적 강박은 결국 인간 사회로 향했다.

그는 우생학의 맹렬한 전도사가 되었다.

인간을 우월한 집단과 열등한 집단으로 나누고, 부적합하다고 판정된 이들의 번식을 막아야 한다는 끔찍한 사상이 과학의 탈을 쓰고 퍼져나갔다.

저자는 이 씁쓸한 진실 앞에서 조던을 더 이상 영웅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과학이 철저히 객관적일 것이라 믿지만, 학자의 권력욕과 잘못된 확신이 결합했을 때 그것은 가장 잔혹하고 합법적인 폭력이 된다.

생명의 다양성을 연구하던 위대한 학자가 역설적으로 가장 폭력적인 차별의 설계자가 되어버린 씁쓸한 모순이다.

이름표가 뜯겨나간 자리에 찾아온 자유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놀라운 과학적 팩트다.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물고기’라고 뭉뚱그려 불렀던 생물들은, 진화론적 계통으로 보았을 때 결코 하나의 집단으로 묶일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인간이 세상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그어놓은 편의적인 선, 그 오만한 분류표가 완전히 틀렸음이 증명된 것이다.

하지만 이 깨달음은 혼란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안도감을 준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만든 이름과 범주가 틀릴 수 있다면, 우리를 옥죄던 수많은 사회적 기준과 통념들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뜻하기 때문이다.

룰루 밀러는 조던의 낡은 질서가 무너진 그 빈자리에서 역설적으로 삶의 해방감을 얻는다.

정해진 위계질서나 완벽한 범주가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와 타인을 더 넓게 품어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결국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장은 상식이 무너진 폐허에서 건져 올린 가장 다정한 위로다.

나를 규정하던 낡은 이름표를 기꺼이 뜯어낼 때, 비로소 우리는 더 자유롭고 충만한 세계를 헤엄칠 수 있다.

여러 물고기 도감 삽화 위에 붉은 X 표시가 크게 그어져 있어 질서와 분류 체계를 부정하는 메시지를 시각화한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관련 이미지.
출처 : aladin

💡 통계와 분류가 인간의 삶을 재단할 때

룰루 밀러가 추적한 조던의 우생학이 과학적 오만에서 비롯된 비극이라면,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철저한 통계로 인간의 목숨을 저울질해야 했던 또 다른 과학자의 딜레마도 있다.
과학적 성취와 인간의 윤리가 충돌하는 지점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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