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얼어붙은 대지 위에 버려진 한 남자가 있다.
그는 곰에게 갈기갈기 찢긴 살점을 기워 붙이고, 아들의 죽음을 방관한 자의 뒤를 쫓아 앙상한 눈밭을 기어가고 있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겉보기엔 피비린내 나는 처절한 복수극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지만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진정으로 포착하고자 했던 것은, 한낱 인간의 분노 따위는 가볍게 집어삼키는 대자연의 압도적인 숭고함과 그 무심함 속에서도 기어코 이어지는 생명의 경이로움이다.
이 작품은 인간의 복수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그리고 산다는 것의 본질이 얼마나 날 것의 고통을 수반하는지를 가장 극한의 체험으로 스크린 위에 쏟아낸다.

개척기의 눈보라, 야만과 탐욕이 교차하는 서사
이들의 처절한 궤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가장 노골적인 야만이 자행되던 1820년대의 미국 서부로 들어가야 한다.
모피가 곧 황금이던 이 시기, 백인들은 이윤을 위해 자연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원주민들의 터전을 짓밟았다.
주인공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이 폭력적인 시대의 한가운데서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에 위태롭게 서 있는 인물이다.
백인이지만 파니족 아내를 두고 혼혈 아들 ‘호크’를 키우는 그는, 어느 쪽 사회에서도 온전히 환영받지 못하는 뼈아픈 상실을 안고 살아간다.
그가 곰에게 찢긴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든 숨을 붙어있으려 했던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그 차별받는 혼혈 아들을 지켜내기 위한 처절한 부성애였다.
반면, 그를 배신하고 아들을 죽인 존 피츠제럴드(톰 하디)는 19세기 미국 자본주의의 탐욕을 흉측하게 응축해 놓은 괴물이다.
과거 원주민에게 머리 가죽이 벗겨지는 끔찍한 고문(스캘핑)을 당해 깊은 흉터와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그는,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오직 ‘생존’과 ‘돈’이라는 맹목적인 목적에만 집착한다.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려 했던 글래스와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피츠제럴드의 충돌은, 단순한 개인의 원한을 넘어 당시 미국 사회가 품고 있던 폭력적이고 탐욕스러운 역사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렌즈에 맺힌 입김, 철저하게 직조된 생존의 감각
이 거대한 역사의 축소판을 단순한 관람이 아닌 ‘체험’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일등 공신은 단연 엠마누엘 루베즈키 촬영감독의 경이로운 카메라 워크다.
인공조명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직 차가운 자연광만으로 담아낸 영상은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답고 또 잔혹하다.
무엇보다 카메라는 멈춰 서서 풍경을 관조하지 않는다.
인물들의 턱밑까지 다가가 그들의 거친 숨소리와 고통스러운 신음을 생생하게 담아낸다.
휴 글래스가 뿜어내는 뜨거운 입김이 카메라 렌즈에 허옇게 서리고, 튀어 오른 핏방울이 화면을 덮는 순간, 관객은 따뜻한 극장 의자에서 떨어져 나와 영하의 숲속 한가운데로 속절없이 내동댕이쳐진다.
대사 한마디 없이 오직 영상과 소리만으로 추위와 고통의 감각을 전이시키는 연출의 정점이다.

복수라는 이름의 앙상한 동력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휴 글래스를 걷게 만든 것은 피츠제럴드를 향한 증오와 복수심이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이 복수의 여정을 결코 영웅적이거나 정의롭게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광활한 눈밭 위를 기어가며 생살을 뜯어먹고 죽은 말의 내장을 파내어 추위를 피하는 그의 모습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짐승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피츠제럴드의 탐욕도, 휴 글래스의 복수심도, 거대한 자연의 법칙 앞에서는 모두 똑같이 미약하고 앙상한 생존 본능에 불과하다는 것을 영화는 묵묵히 조명한다.
대자연은 악인과 선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잔혹한 시련을 내릴 뿐이다.

🚨 [스포일러 주의] 아래 내용부터는 결말에 대한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판을 대자연의 카르마로 흘려보내다
영화의 결말부는 복수극의 전형적인 카타르시스를 완벽하게 배반하며, 작품의 철학적 깊이를 한 차원 끌어올린다.

1. 창조주의 대리인에게 넘긴 완벽한 인과응보
마침내 피츠제럴드를 쓰러뜨리고 그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찰나의 순간, 휴 글래스는 강물 저편에 서 있는 아리카라족 무리를 발견하고 칼을 거둔다.
“복수는 창조주의 뜻에 달려 있다.”
자신을 구해줬던 원주민의 그 한마디를 떠올린 그는, 숨통이 끊어지지 않은 원수를 차가운 강물 위로 떠내려 보낸다.
이는 단순히 복수를 포기하거나 막연한 운명에 몸을 맡긴 것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원주민들은 단순한 주변인이 아니라 거대한 대자연의 순리와 질서를 대리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과거 치열한 도주 중에도 아리카라족 추장의 딸(포와카)을 겁탈의 위기에서 구해냈던 글래스는 직감한 것이다.
자신이 베풀었던 선의가 거대한 카르마(업보)가 되어 돌아와 저 악인을 심판할 것임을 말이다.
결국 원주민들은 피츠제럴드를 잔혹하게 처단하지만, 은인인 글래스는 묵묵히 스쳐 지나가며 살려둔다.
사적 복수의 얄팍한 주도권을 내려놓고 대자연의 이치와 인과응보의 흐름에 심판의 권리를 위임한 이 선택은, 분노에 잡아먹혔던 한 인간이 도달한 가장 현실적이고 완벽한 결말이다.
2. 허공을 향한 응시, 살아남은 자의 먹먹한 침묵
모든 것이 끝난 후, 피 묻은 얼굴로 눈밭에 홀로 남겨진 휴 글래스 앞에 죽은 아내의 환영이 나타나 옅은 미소를 지으며 멀어진다.
그리고 카메라는 천천히 글래스의 얼굴로 다가간다.
거칠게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는 불현듯 고개를 돌려 스크린 너머의 관객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이 마지막 눈빛이 남기는 여운은 아득할 정도로 무겁다.
지독하게 살아남았고 인과응보는 완성되었지만, 복수라는 유일한 삶의 목적을 떠나보낸 후 그에게 남은 것은 공허함뿐이다.
아무런 대사 없이 관객과 시선을 맞추는 그의 눈은 묻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라고.

💡 야생의 눈밭에서 가장 호화로운 온실로
대자연의 무심함 앞에서 짐승처럼 발버둥 치는 인간의 날 것 그대로를 마주했다면,
이번엔 가장 화려하고 우아한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 본성의 붕괴를 지켜보면 어떨까.
‘가진 자들의 체면’이라는 가면이 어떻게 맥없이 찢겨나가는지 궁금하다면
👉 [성난 사람들 시즌 2: 우아한 울타리 안에서 붕괴되는 위선에 대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