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아 씨 힘들게 하는 그거랑 싸우지 마요. 가위 같은 거예요. 상대 안 하면. 지나가요. 그냥 지나가게 둬요.”
우리는 모두 타인에게, 그리고 내 자신에게 ‘나는 꽤 괜찮은 인간이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인생 전부를 걸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잘나서 증명해 보일 수 없다면 망가져서라도 특별해져야 한다는 씁쓸한 강박.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를 통해 현대인의 헛헛한 내면을 섬세하게 어루만져 온 박해영 작가의 신작,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를 정주행하며 나는 줄곧 내 안의 가장 부끄러운 감정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듯한 뼈아픈 공감과 먹먹함을 동시에 느꼈다.

구교환, 고윤정 배우가 빚어낸 이 작품은 화려한 성공 스토리나 사이다 같은 복수극이 아니다. 그저 잘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만 뒤처져 시기와 질투로 허우적대는,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찌질해서 차마 미워할 수조차 없는 우리들의 민낯에 관한 아주 다정한 관찰기다.

“내 인생이 왜 네 맘에 들어야 되나”, 증명에 지친 찌질함의 미학
주인공 황동만(구교환)은 오랜 시간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인물이다. 주변 친구들은 모두 번듯하게 자리 잡고 잘나가는데, 혼자만 머물러 있다는 지독한 자격지심. 동만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에 참견하고 요란하게 구는 소위 ‘밉상’ 캐릭터로 등장한다.
처음엔 매사 비틀려있는 그의 언행이 불편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밉상이라 손가락질받던 그의 모습에서, 타인과 나를 쉴 새 없이 저울질하며 비교의 단두대 위에 스스로를 올려놓곤 했던 내 초라한 내면이 겹쳐 보였다.
성공과 불안 사이에서 벼랑 끝에 몰린 동만이 “내 인생이 왜 네 맘에 들어야 되나!”라고 토해낼 때, 나는 성공이라는 잣대에 맞춰 억지로 껴입었던 무거운 외투를 훌렁 벗어던진 것 같은 묘한 카타르시스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붉게 빛나는 ‘감정 워치’가 들춰낸 우리의 불안
이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가장 흥미로운 장치는 인물들의 손목에 채워진 ‘감정 워치’다. 불안, 결핍, 공허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면 스마트워치의 액정이 붉은빛으로 깜빡인다.
동만의 워치가 시도 때도 없이 붉게 물드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내 손목에도 저 워치가 있다면 하루에 몇 번이나 붉은빛을 뿜어낼까 상상해 보았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날 때, 혹은 SNS 속 타인의 완벽한 일상을 보며 미세한 스트레스가 쌓여갈 때 우리는 모두 각자의 손목 위에서 붉은 경고등을 켜고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드라마는 우리가 필사적으로 감추려 했던 이 ‘무가치함’과 불안의 감정이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누구나 겪어내야 할 지극히 당연한 과정임을 조용히 일러주는 듯했다.

가위눌림처럼, 지나가기를 기다려주는 다정한 연대
동만과 변은아(고윤정)가 서로의 결핍을 알아보고 위로하는 방식은 이 드라마의 백미다.
섣부르게 “다 잘 될 거야”, “힘내”라는 독이 든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자신을 갉아먹는 내면의 악당과 매일 피 터지게 싸우는 은아를 향해 동만은 툭 던진다.
“그거랑 싸우지 마요. 가위(가위눌림) 같은 거예요. 상대 안 하면 지나가요.”
어금니 꽉 깨물고 싸워 이기려는 대신, 때로는 그저 무력하게 내버려두고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진짜 나를 지키는 방법일 수 있다는 그 투박한 통찰. 서로의 뾰족하고 모난 구석을 바꾸려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묵묵히 곁을 내어주는 두 사람의 연대를 지켜보며 나는 그 어떤 로맨스보다 더 짙은 온기를 느꼈다.

세상의 속도에 지쳐 자격지심에 빠진 날이라면
내주변 사람들은 다 저만치 앞서 달려가는데 나 홀로 멈춰 서서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같다는 자괴감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 드라마를 권하고 싶다.
억지로 괜찮은 척 꾸며낼 필요 없다고, 가끔은 한없이 찌질해지고 요란하게 무너져내려도 괜찮다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황동만과 변은아의 이야기가 당신의 붉게 달아오른 감정 워치를 조용히 식혀줄 것이다. 평균의 삶을 좇느라 상처받은 이 세상 모든 비주류를 향한, 올 한 해 마주한 가장 다정하고 눈부신 위로다.

남들의 시선과 화려한 타이틀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다 처절하게 무너져내린 씁쓸한 현실 고증을 보았다면, 반대편에는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초라한 밑바닥에서도 기어코 자신만의 빛나는 가치를 건져 올리려는 사람들의 따뜻한 분투기가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진짜 내 마음의 해방을 찾아 나선 또 다른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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