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향한 궤도를 계산한 그림자들: 1960년대 NASA의 흑인 여성들

냉전의 시대, 우주를 향한 경쟁은 백인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보였다.

1961년 유리 가가린이 우주로 향하고,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에 발을 내디뎠을 때 전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는 화려한 우주비행사들과 백인 과학자들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그 눈부신 영광의 이면에는 흑인 여성이라는 이중의 차별 속에서 인간 컴퓨터(Human Computer)로 복무해야 했던 이들이 있었다.

영화 히든 피겨스가 조명한, 1960년대 버지니아주 랭글리 연구소(Langley Research Center)의 서늘하고도 위대한 실제 기록을 들여다본다.

야외 행사장에서 여성들이 나란히 서서 앞을 바라보는 가운데, 가운데 인물이 단호한 표정으로 시선을 고정한 영화 _히든 피겨스_의 장면.
출처: TMDB

유색인종 화장실과 우주로 가는 수학 (1953-1958)

1950년대 미국 남부 버지니아주는 철저한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 인종분리법)의 지배를 받았다.

국가의 최첨단 과학기술이 모이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전신, 국립항공자문위원회(NACA)의 랭글리 연구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서관 계산 그룹(West Area Computers)에 배치된 흑인 여성 수학자들은 백인들과 다른 식당을 써야 했고, 800미터나 떨어진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가기 위해 비바람을 뚫고 달려야 했다.

커피 포트조차 공유할 수 없는 차별의 벽 앞에서도 이들은 머큐리 프로젝트의 복잡한 궤도 방정식을 손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편견은 그들의 피부색을 가렸지만, 그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천체역학의 정확성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흰 셔츠 차림의 남성들 사이에 한 여성이 홀로 서서 침착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영화 _히든 피겨스_의 인상적인 장면.
출처: TMDB

기계가 아닌 인간을 믿었던 순간: 캐서린 존슨과 존 글렌 (1962)

이 숨겨진 영웅들의 존재가 결정적으로 빛을 발한 것은 1962년 2월, 존 글렌(John Glenn)의 프렌드십 7호 궤도 비행 때였다. 당시 나사는 방 덩어리만 한 IBM 7090 전자식 컴퓨터를 막 도입해 궤도를 계산했지만, 초기 기계의 불안정성 탓에 결과값은 번번이 엇나갔다.

목숨을 걸고 우주로 나가야 했던 존 글렌은 기계의 계산을 믿지 못했다.
그는 발사를 앞두고 정확히 흑인 수학자 캐서린 존슨을 지목하며 “그 여성에게 숫자를 다시 확인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캐서린이 며칠 밤을 새워 데카르트 기하학과 오일러의 공식을 동원해 IBM의 궤도 계산이 정확함을 손으로 검증해 낸 뒤에야, 존 글렌은 비로소 우주선에 올랐다.

차별의 시대에, 미국의 가장 위대한 우주비행사가 자신의 목숨을 맡긴 것은 최첨단 기계가 아니라 한 흑인 여성의 흑연필이었다.

수학 공식이 가득한 거대한 칠판 앞에서 한 여성이 계산을 이어가고, 주변 사람들이 숨죽여 지켜보는 영화 _히든 피겨스_의 장면.
출처: TMDB

시대의 한계를 스스로 부순 선구자들

캐서린 존슨뿐만이 아니다.

도로시 본(Dorothy Vaughan)은 나사 최초의 흑인 여성 그룹 감독관이었다.
그녀는 거대한 IBM 컴퓨터가 도입되면 인간 계산수들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을 직감하고, 자신과 부하 직원들에게 독학으로 포트란(FORTRAN) 프로그래밍 언어를 가르쳤다. 시대의 변화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그 시스템을 통제하는 관리자가 된 것이다.

메리 잭슨(Mary Jackson)은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필수 자격을 얻기 위해 버지니아주 햄프턴 고등학교의 백인 전용 야간 수업을 듣게 해달라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판사를 설득해 기어코 백인들의 교실에 당당히 걸어 들어간 그녀는 1958년, 나사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가 되었다.

장벽 너머로 쏘아 올린 인류의 진보

이들의 궤적은 단순히 우주 경쟁의 숨은 조력자를 발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들이 계산한 것은 로켓이 지구를 벗어나는 궤도였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류가 오랜 시간 쳐놓은 인종과 성별의 장벽을 부수고 나아가는 궤적이기도 했다.

세상이 그들에게 유색인종 전용이라는 선을 그었을 때, 그들은 숫자로 우주의 무한한 공간을 그려냈다. 국가의 시스템이 그들을 투명 인간 취급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실력으로 시대가 자신들을 원하게 만들었다.

히든 피겨스의 기록은 차별이 만연했던 지상의 중력을 이겨내고, 스스로 빛나는 별이 된 이들의 가장 뜨겁고 경이로운 증명서다.

NASA 로고가 있는 넓은 실내 공간에서 여러 여성이 줄지어 이동하는 영화 _히든 피겨스_의 장면.
출처: TMDB

💡 또 다른 과학의 이면, 시대가 외면한 천재의 기록

우주를 향한 도약 뒤에 흑인 여성들의 숨겨진 땀방울이 있었다면, 세상을 파괴할 무기를 만든 뒤 철저히 국가에 의해 버려진 천재의 이면도 존재한다. 국가와 과학, 그리고 개인의 운명이 어떻게 교차하는지 궁금하다면 아래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함께 읽어보길 권한다.

👉 [프로메테우스의 영광과 형벌: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궤적과 시대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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