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대 어느 미치광이 천재의 붓질, 영화<취화선>리뷰

활활 타오르는 도자기 가마 속으로 제 발로 기어 들어가는 한 남자가 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화선지 위에 쏟아내고도 끝내 자신의 한계를 넘지 못해, 마침내 스스로 불꽃이 되기를 선택한 짐승 같은 화가.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은 고상한 예술 영화가 아니다.

처음 볼 때는 조선의 사계절과 수묵화의 아름다움에 취하지만, 다시 보면 재능이라는 끔찍한 저주를 짊어진 한 인간의 생존기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완벽을 향한 갈망이 인간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 묻는 잔혹한 철학서로 남는다.

이 영화는 ‘오원 장승업’이라는 실존 인물을 다루지만, 위인전의 문법을 철저히 거부한다.

스크린 속 그는 고결한 선비가 아니라 술에 취해 길바닥을 구르고, 욕정을 참지 못하며, 툭하면 상을 엎어버리는 난봉꾼에 가깝다.

감독은 왜 천재의 가장 추악하고 날 것 그대로의 밑바닥을 집요하게 전시했을까.

흰 도포 차림의 남성이 기와지붕 위에 걸터앉아 웃고 있는 모습과 한글 제목이 함께 배치된 영화 취화선의 한국판 포스터.
출처: tmdb

술과 광기, 천재를 버티게 하는 마취제

장승업(최민식)은 붓을 쥐지 않을 때는 늘 술에 취해 있다.

사람들은 그 광기를 예술가의 낭만이나 호기로 포장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그 술통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다.

그것은 낭만이 아니라 마취제다.

그는 너무 높은 곳을 보는 눈을 가졌지만, 육신과 손끝이 그 경지를 온전히 따라가지 못하는 괴리에 평생을 시달렸다.

남들은 명작이라며 금은보화를 싸 들고 오지만, 정작 자기 눈에는 한없이 가짜 같고 모자란 붓질.

맨정신으로는 그 지독한 재능의 한계를 견딜 수 없어 그는 끊임없이 술을 들이붓는다.

천재성은 축복이 아니라, 스스로를 갉아먹어야만 빛을 내는 징글징글한 형벌이다.

한복을 입은 손예진이 자수틀에 학 그림을 수놓고, 옆에서는 다른 여성이 시중을 드는 전통 한옥 실내 장면이 담긴 영화 취화선의 이미지.
출처: tmdb

무너지는 시대, 그리고 무력한 화선지

이 영화가 단순히 개인의 광기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장승업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화선지 밖의 조선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외세가 침략하고, 동학 농민 운동의 피바람이 불며, 백성들은 굶어 죽어간다.

장승업의 붓은 세상을 구할 수 없다.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기생의 치마폭에 난초를 치고, 권력자들의 병풍에 새와 꽃을 그리는 것뿐이다.

시대의 참혹함과 화선지 위 수묵화의 정결함.

이 극단적인 대비는 예술이 현실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고 허망한 것인지를 뼈아프게 찌른다.

예술가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붓으로 총알을 막을 수도 없는 모순 속에 갇혀버린다.

붉게 물든 가을 숲길을 따라 흰 한복 차림의 남성이 보따리를 메고 걸어가는 영화 취화선의 장면.
출처: tmdb

🚨 스포일러 주의 : 아래 내용에는 영화 결말에 대한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승업이 불타는 가마 속으로 기어 들어간 이유

영화의 백미이자 가장 충격적인 결말, 장승업이 활활 타오르는 가마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엔딩은 지금도 수많은 해석을 낳는다. 누군가는 자살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예술적 우화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가마 속으로 들어간 것은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완성’이다.

그림이라는 껍데기를 넘어 스스로 불멸의 예술품(도자기)이 되고자 했던 발악. 혹은 머릿속의 이상향을 따라오지 못하는 늙고 둔해진 육신을 마침내 땔감으로 던져버린 해방의 의식이다.

이 장면은 끔찍하면서도 이상할 만큼 숭고하다.

경계에 갇힌 인간이 그 선을 넘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 뜨거운 마침표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잿더미 위에서 피어난다

<취화선>은 뜨겁다.

예술의 본질을 다루고, 몰락하는 시대를 다루며, 광기를 다룬다.

그런데 끝내 남는 것은 한계를 넘지 못해 헐떡이는 한 남자의 거친 숨소리다.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그 그림 한 장을 얻기 위해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타들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영화.

그래서 이 작품은 고상한 척하지 않는다. 땀 냄새와 술 냄새, 그리고 종이가 타들어 가는 매캐한 연기 냄새로 가득하다.

시간이 지나 다시 꺼내 본 <취화선>은 여전히 서늘하고 묵직하다.

타협하며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걷어차고, 기어코 불구덩이로 뛰어든 미치광이의 붓질이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린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태우며 살고 있는가. 적당한 타협 속에서 미지근하게 식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단 한 번이라도 스스로를 하얗게 불태워본 적이 있는가.

눈 덮인 넓은 들판 사이 좁은 길을 따라 두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과 한글 제목이 함께 담긴 영화 취화선의 한국판 포스터.
출처: tmdb

💡 불타는 가마에서 로마의 핏빛 모래판으로

완벽을 향한 집념 하나로 불덩이 속에 자신의 육신을 던진 조선의 예술가를 만났다면, 이번엔 거대한 제국의 권력에 맞서 모래판 위에 기꺼이 자신의 피를 뿌린 남자를 만나보지 않겠는가.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처절한 사투가 궁금하다면
👉 [제국의 탐욕을 베어낸 노예의 검, 영화 <글래디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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