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라는 이름표 뒤에서 조용히 마모되어간 한 사람 :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 리뷰

“나는 내가 구하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고통받는 겁니다.”

‘미군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 ‘공식 확인된 사살만 160명’.

이 화려하고도 소름 돋는 수식어만 보면,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엄청난 애국심으로 무장한 화끈한 전쟁 영웅담일 것이라 짐작하기 쉽다. 나 역시 처음 이 영화의 포스터를 마주했을 땐 흔한 할리우드식 밀리터리 액션물일 거라 생각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 영화 포스터 이미지로, 주인공 저격수를 연기하는 남성 배우가 흔들리는 성조기 앞에 선 실루엣으로 등장해 전쟁과 애국심, 개인의 고독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비주얼.
출처: tmdb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과 주연 브래들리 쿠퍼가 빚어낸 이 묵직한 실화 바탕의 영화를 다 보고 났을 때, 내 가슴에 남은 건 쾌감이 아니라 숨을 턱 막히게 하는 지독한 먹먹함이었다.

이 영화는 적을 통쾌하게 물리치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속에서 한 평범한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천천히, 그리고 철저하게 마모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심리 다큐멘터리처럼 다가왔다.

아메리칸 스나이퍼 영화 포스터 이미지로, 저격수를 연기하는 남성 배우와 아내를 연기하는 여성 배우가 서로를 마주 보는 모습 위로 성조기가 겹쳐져 전쟁과 가족 사이의 감정적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장면.
출처: tmdb

방아쇠를 당겨야만 했던 첫 번째 표적

주인공 크리스 카일(브래들리 쿠퍼)은 조국과 전우를 지키겠다는 투철한 신념 하나로 네이비 실(Navy SEAL)에 자원입대해 이라크 파병길에 오른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숨죽이고 지켜봤던, 그리고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장면은 크리스가 스나이퍼로서 처음 방아쇠를 당겨야 했던 순간이다. 그의 십자선(크로스헤어) 안에 들어온 표적은 건장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대전차 수류탄을 품고 미군을 향해 달려드는 평범한 여인과 어린아이였다.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내 동료들이 죽고, 방아쇠를 당기면 내가 어린아이를 죽인 살인자가 되는 그 끔찍한 딜레마.

망설임 끝에 결국 아이를 향해 총을 쏘고 난 뒤, 미세하게 떨리던 크리스의 눈빛을 보며 나는 전쟁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한 선택을 강요하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건 결코 자랑스러운 훈장이 아니라, 평생 안고 가야 할 지옥의 시작점처럼 보였다.

아메리칸 스나이퍼 영화 스틸 이미지로, 저격수를 연기하는 남성 배우가 망원조준경이 장착된 소총을 겨누고 엎드린 채 목표를 주시하는 모습이 전투 현장의 집중력과 압박감을 강조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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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버린 텔레비전과 귓가를 맴도는 전쟁의 환청

이 영화가 정말 무서우면서도 훌륭하다고 느꼈던 지점은, 이라크의 흙먼지 날리는 전장보다 미국에 있는 ‘크리스의 평화로운 집’을 비출 때였다.

파병을 마치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크리스의 영혼은 여전히 전장에 머물러 있었다. 텍사스의 평화로운 거리를 걸으면서도 쓰레기더미 속에 폭탄이 숨겨져 있을까 봐 불안해하고, 잔디 깎는 기계 소리에 심장이 내려앉으며, 전원이 꺼진 까만 텔레비전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총소리의 환청을 듣는 그의 모습.

사람들은 그를 ‘레전드(전설)’라 부르며 영웅 대접을 했지만, 정작 그는 아내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고 서서히 일상의 끈을 놓치고 있었다. 이 좁혀지지 않는 전장과 일상의 괴리를 지켜보며, 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는 단어가 얼마나 한 인간의 삶을 피폐하고 처절하게 갉아먹는 병인지 아주 무겁게 체감할 수 있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 영화 스틸 이미지로, 저격수를 연기하는 남성 배우가 전투복 차림으로 어두운 수송기 내부에 홀로 앉아 생각에 잠긴 모습이 전쟁 이후 남겨진 피로와 침묵의 감정을 보여주는 장면.
출처: tmdb

영웅의 칭호가 남긴 너무나 잔인한 청구서

크리스는 총 4번의 파병을 마치고 마침내 완전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길고 긴 터널을 지나 상처받은 참전 용사들을 돕는 봉사활동을 하며 점차 평범한 남편이자 아빠의 미소를 되찾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 실화 영화의 결말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이, 혹은 그 어떤 비극보다 더 어이없이 끝이 난다. 수많은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전설의 저격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돕고자 했던 또 다른 PTSD를 앓는 참전 용사의 총에 맞아 허망하게 생을 마감한다. 검은 화면 위로 조용히 올라오는 그의 실제 장례식 자막을 보며,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국가가 한 개인에게 영웅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며 청구한 대가가 이토록 무겁고 잔인한 것인가 하는 씁쓸함이 짙게 남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 영화 스틸 이미지로, 군복을 입은 저격수를 연기하는 남성 배우가 수송기 내부에서 관이 놓인 공간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모습이 전우의 죽음과 전쟁의 상실감을 묵직하게 전달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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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진짜 민낯을 마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총알이 빗발치고 적진을 뚫고 나가는 통쾌한 아메리칸 히어로물을 기대한다면 이 영화는 아주 실망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방아쇠를 당길 때 그 총알의 무게가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관통하는지, 그리고 국가 간의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개인의 내면에서는 얼마나 참혹한 전쟁이 계속되는지 궁금하다면 반드시 이 작품을 마주해 보기를 권한다. 크리스 카일의 묵묵한 뒷모습은,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고 있는 우리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진짜 전쟁의 맨얼굴을 아프게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 영화 스틸 이미지로, 저격수를 연기하는 남성 배우와 아내를 연기하는 여성 배우가 바에서 마주 보며 대화하는 모습이 전쟁 바깥의 사적인 관계와 감정의 균열을 보여주는 장면.
출처: tmdb

훈장과 영웅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참전 용사의 무너져가는 영혼을 지켜보며 먹먹함을 느끼셨다면, 반대편에는 조국을 위해 뛰어들었지만 결국 소년병들의 허무한 죽음만을 남긴 또 다른 처절한 전쟁의 기록이 있습니다. 승자도 영웅도 없는, 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 지독하게 차가운 진흙탕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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