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추천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 (2022)> 리뷰: 고지전과 너무나 닮은, 가장 끔찍하고 허무한 15분의 기록

“이 군복, 다른 사람의 이름표가 붙어 있는데요?”

“아, 사이즈가 안 맞아서 반납한 모양이군.”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처음 틀었을 때, 초반 10분 만에 등장하는 이 평범한 대사는 내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하게 만들었다. 2022년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공개된 이 독일 영화는,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유명한 고전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방금 전까지 피를 흘리며 죽어간 병사의 군복을 벗겨서, 핏자국을 대충 세탁하고 꿰맨 뒤 새로운 신병에게 입혀주는 소름 돋는 재활용.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새 군복을 입고 영웅이 될 생각에 들떠 웃음 짓는 앳된 소년병들의 얼굴을 보며, 관람자는 이 영화가 결코 영웅적인 승리를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하고 슬픈 예감을 직감하게 된다.

앞서 보았던 한국 영화 <고지전>이 떠오르는, 지독하게 차갑고 허무한 반전(反戰) 영화의 진짜 얼굴을 마주한 것이다.

철모를 쓴 젊은 병사가 뒤를 돌아보는 클로즈업 포스터 이미지로, 공포와 경계심이 뒤섞인 표정이 전장의 불안을 드러내는 장면.
출처: tmdb

낭만으로 포장된 지옥, 참호 속의 진흙탕

주인공 파울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평범한 열일곱 살 소년이다. 학교 선생님의 웅장한 연설과 친구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전쟁터에 나가면 멋진 훈장을 달고 돌아올 수 있을 거란 착각에 빠져 자원입대한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최전방 ‘서부 전선’은 낭만과는 거리가 먼 생지옥이었다. 군화는 진흙탕에 푹푹 빠지고, 밤낮없이 떨어지는 포탄 소리에 친구들은 며칠 만에 사지가 찢겨 죽어 나간다. 이 영화에는 화려한 작전이나 지휘관의 멋진 돌격 명령 따위는 없다. 그저 살기 위해 더러운 흙탕물 속에 얼굴을 박고, 총알을 피하기 위해 죽은 친구의 시체 밑으로 기어들어 가야 하는 짐승 같은 생존의 몸부림만 있을 뿐이다.

가장 끔찍하고 슬펐던 장면은 파울이 흙구덩이 속에서 적군인 프랑스 병사를 칼로 찌른 뒤의 모습이었다. 적을 죽였다는 기쁨은커녕, 피를 흘리며 숨을 헐떡이는 적군의 입에 흙 묻은 손으로 물을 떠 먹여주며 “미안해, 죽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라고 오열하는 파울의 모습. 진짜 악당은 눈앞에 있는 다른 나라 병사가 아니라, 이들을 이 지옥 구덩이로 밀어 넣은 전쟁 그 자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명장면이었다.

참호에 몸을 낮춘 병사들이 소총을 겨눈 채 전방을 주시하는 전투 장면으로, 1차 세계대전 참호전의 긴장감과 생존 본능을 담은 이미지.
출처: tmdb

따뜻한 와인과 차가운 진흙 빵의 대비

영화를 보는 내내 <고지전>의 윗선들이 떠올라 주먹을 꽉 쥐게 만든 이유는, 감독이 보여주는 아주 날카로운 교차 편집 때문이었다.

전방의 어린 소년들은 먹을 게 없어서 흙 묻은 빵을 뜯어 먹고, 빗물이 고인 참호에서 벌벌 떨고 있다. 하지만 화면이 바뀌면 전쟁을 지휘하는 장군과 정치인들은 난로가 피워진 따뜻한 기차 안에서 고급 와인과 신선한 크루아상을 먹으며 휴전 협정을 논의한다. 자기 자식들은 절대 보내지 않을 사지로 남의 집 귀한 아들들을 밀어 넣고, “국가의 자존심” 운운하며 탁상공론을 벌이는 그들의 오만한 얼굴은 전쟁이라는 비극이 얼마나 불공평하고 잔인한 게임인지 적나라하게 꼬집는다.

서부전선이상없다 영화 스틸 이미지로, 진흙과 먼지로 뒤덮인 젊은 병사가 황폐한 전장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전쟁의 공포와 생존의 절박함을 강하게 보여주는 장면.
출처: tmdb

농장 소년의 총탄, 가장 어이없고 허무한 죽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전쟁의 허무함은 파울의 가장 친한 동료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카트’의 죽음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먼지와 얼룩이 묻은 군복 차림의 두 병사가 깨진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장면으로, 전쟁 속 불안과 충격의 순간을 포착한 이미지.
출처: tmdb

전쟁이 끝나기 직전, 굶주림에 지친 두 사람은 예전처럼 근처 프랑스 농장으로 거위를 훔치러 간다. 수년 동안 그 끔찍한 포탄과 독가스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베테랑 군인 카트. 하지만 그를 죽인 건 적군의 기관총이 아니라, 농장을 지키던 어린 꼬마 소년이 쏜 총 한 발이었다.

거위 한 마리 때문에, 그것도 군인도 아닌 어린아이의 총에 맞아 허무하게 숲속에 쓰러진 카트의 모습은 기가 막힐 정도로 씁쓸하다. 파울은 그를 살리겠다며 어깨에 들쳐업고 야전 병원까지 죽을힘을 다해 뛰어가지만, 카트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감독은 이 어이없는 죽음을 통해 전쟁의 진짜 비극을 이야기한다. 전쟁은 웅장한 영웅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거위 한 마리에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적개심에 물든 어린아이가 사람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방아쇠를 당기게 만드는 무서운 폭력의 굴레라는 것을 말이다. 수많은 전투를 겪어낸 노련한 군인이 아이의 총에 허망하게 죽는 이 장면은, 전쟁터의 죽음에는 어떠한 낭만도, 멋진 이유도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잔인하게 증명해 주었다.

안개 낀 겨울 숲에서 군인과 소년이 총을 마주한 장면으로, 전쟁이 인간성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
출처: tmdb

<고지전>의 12시간과 판박이였던 마지막 15분

이 영화가 한국의 <고지전>과 마치 영혼을 나눈 쌍둥이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결말에 있다. 길고 끔찍했던 전쟁이 끝을 맺고, 마침내 ‘오전 11시’를 기점으로 모든 공격을 멈춘다는 휴전 협정이 맺어진다.

하지만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콧대 높은 독일 장군은, 휴전을 불과 ’15분’ 남겨둔 10시 45분에 병사들을 향해 마지막 총공격을 명령한다. 이제 15분만 버티면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을 안아볼 수 있었던 파울과 병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또다시 적군의 기관총 앞으로 등을 떠밀린다.

<고지전>에서 휴전을 12시간 남겨두고 의미 없는 안개 속 고지로 뛰어들어야 했던 병사들의 비극이 1차 세계대전의 서부 전선에서도 똑같이 반복된 것이다. 결국 시계가 11시를 가리키며 숲 속에 정적이 찾아왔을 때, 진흙투성이가 된 파울의 차가운 얼굴을 비추는 엔딩은 그 어떤 화려한 슬픈 음악 없이도 관람자의 가슴을 날카롭게 베고 지나간다.

진흙과 상처로 얼룩진 젊은 병사가 푸른빛 어둠 속에서 숨을 고르는 장면으로, 전쟁이 남긴 공포와 소진된 감정을 보여주는 이미지.
출처: tmdb

전쟁의 진짜 맨얼굴을 마주할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할리우드 영화 특유의 영웅주의나 감동적인 전우애, 통쾌한 구출 작전을 기대한다면 이 영화는 피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고지전>을 보며 느꼈던 그 먹먹함의 이유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사람. 권력자들의 탁상공론 때문에 어이없이 바스러져야 했던 수많은 젊음의 무게를 숨 막히게 체험해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작품은 넷플릭스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필수 관람작이다. 영화가 끝난 뒤, 사상자 300만 명이 넘었지만 지도상의 전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는 건조한 자막을 보며 “전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가슴에 뼈저리게 새기게 될 것이다.

서부전선이상없다 영화 포스터 이미지로, 폐허가 된 전장 위를 홀로 걷는 병사의 실루엣이 전쟁의 참혹함과 황폐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장면.
출처: tmdb

지도 위 몇 미터를 위해 마지막 15분까지 목숨을 던져야 했던 서부 전선 소년들의 차가운 진흙탕을 보았다면, 여기 휴전 발효를 12시간 남겨두고 안개 낀 산봉우리를 향해 기어올라야 했던 한국 청년들의 피눈물 나는 기록도 있다.
국적과 시대만 다를 뿐, 전쟁의 허무함을 똑같이 꼬집은 한국의 가장 완벽한 반전(反戰) 영화가 궁금하다면.
👉 [고지전: 영웅이 없는 전쟁터, 그들이 진짜 싸워야 했던 무서운 적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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