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는 신들이 인간보다 더 자주 싸운다.
그런데 2004년 볼프강 페터젠 감독의 <트로이>에는 신이 단 한 번도 인간의 몸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 선택 하나가 영화 전체의 결을 원작과 완전히 다르게 만든다.
트로이 전쟁을 ‘신들의 대리전’이 아니라 ‘인간들의 야심과 자존심이 만든 비극’으로 다시 쓴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이 영화가 원작과 구체적으로 어디서, 왜 갈라지는지를 짚어보고, 같은 트로이 전쟁을 다루면서도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와도 자연스럽게 연결해봤다.

영화 기본 정보
감독: 볼프강 페터젠
각본: 데이비드 베니오프
주요 출연: 브래드 피트(아킬레우스), 에릭 배나(헥토르), 올랜도 블룸(파리스), 다이앤 크루거(헬레네), 브라이언 콕스(아가멤논), 브렌든 글리슨(메넬라오스), 숀 빈(오디세우스), 피터 오툴(프리아모스), 로즈 번(브리세이스)
개봉: 2004년
러닝타임: 163분 (극장판) / 감독판 196분
원작: 호메로스, 《일리아스》 (일부 트로이 전쟁 설화 포함)

줄거리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사랑에 빠져 트로이로 도망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에게 복수를 부탁하고, 안 그래도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통합하려는 야심이 있던 아가멤논은 이를 명분 삼아 대규모 연합군을 일으켜 트로이로 향한다. 그리스 최고의 전사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의 지휘 아래 있으면서도 그의 오만함에 염증을 느끼는 인물로 그려지며, 이 균열이 전쟁 내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축이 된다.
원작 《일리아스》와 무엇이, 왜 달라졌나
1. 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일리아스》에서는 아프로디테가 위기에 빠진 파리스를 순간이동으로 구해내고, 아테나와 헤라가 그리스 편에서, 아폴론과 아레스가 트로이 편에서 노골적으로 개입한다. 영화는 이걸 전부 들어냈다. 신탁이나 예언 같은 암시는 남아 있지만, 신이 물리적으로 개입하는 장면은 하나도 없다. 이 선택 덕분에 영화는 ‘신의 뜻에 휘둘리는 인간’이 아니라 ‘자기 선택으로 파멸에 이르는 인간’의 이야기가 됐다.

2. 메넬라오스가 극 중에서 죽는다.
원작에서 메넬라오스는 파리스와의 결투에서 이기고도 여신의 개입으로 파리스를 놓치지만, 전쟁에서 살아남아 《오디세이아》에도 다시 등장한다. 영화에서는 파리스와의 결투에서 이겨놓고도 끝까지 죽이려다 헥토르에게 목숨을 잃는다. 신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이 각색은 단순한 생략이나 축약이 아니라 아예 다른 결말을 만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3.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어린 사촌 동생’이 됐다.
원작에서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보다 나이가 많은 절친한 벗으로, 그의 죽음이 아킬레우스를 전장으로 돌려세우는 결정적 사건이다. 영화는 이 관계를 나이 어린 사촌 동생으로 바꿔, 소년을 지키지 못했다는 보호자로서의 죄책감으로 감정선을 단순화했다. 원작이 품고 있던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애정 관계를 걷어내고, 훨씬 이해하기 쉬운 가족애로 대체한 셈이다.
4. 브리세이스가 트로이 왕가의 사촌이 됐다.
원작에서 브리세이스는 아킬레우스가 다른 도시를 약탈하며 남편을 죽이고 데려온 전리품 여성으로, 트로이 왕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영화는 그를 헥토르와 파리스의 사촌이자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로 재설정해, 적국 여인과의 로맨스라는 극적 긴장을 더했다.
5. 아가멤논이 브리세이스의 손에 죽는다.
이 부분이 가장 과감한 창작이다. 신화에서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가지만, 집에서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살해당한다 — 이 사건은 《오레스테이아》와 《오디세이아》에서 반복해서 언급되는 유명한 뒷이야기다. 영화는 이걸 통째로 들어내고, 트로이 함락 당시 브리세이스가 자신을 겁탈하려는 아가멤논을 찔러 죽이는 것으로 바꿨다. 전쟁의 인과응보를 10년 뒤 그의 집이 아니라, 트로이가 함락되는 그 밤에 앞당겨 처리한 셈이다.

6. 아이아스가 헥토르와의 결투 끝에 죽는다.
신화에서 아이아스는 전쟁 중에 죽지 않는다. 아킬레우스가 죽은 뒤 그의 갑옷을 놓고 오디세우스와 다투다 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전쟁 이후의 이야기다. 영화는 이 인물을 전투 중 사망으로 처리해 서사를 단순화했다.
7. 10년 전쟁이 몇 주로 압축됐다.
《일리아스》는 10년째 이어지던 전쟁의 마지막 몇 주만을 다루는데, 영화는 아예 전쟁의 시작(헬레네의 도주)부터 끝(트로이 함락)까지를 몇 주 안에 몰아넣는다. 그 덕분에 극적 긴장감은 확실히 살지만, 원작이 가진 ‘지루하게 길어지는 전쟁’이라는 정서는 사라졌다.

그래서 이 각색은 실패인가
여기까지 보면 원작 파괴로 보일 수 있지만, 방향성 자체는 나름 일관돼 있다.
영화는 신화를 인간 드라마로 옮기는 과정에서, 신의 자리를 인간의 야심과 자존심으로 채워 넣었다.
아가멤논의 죽음을 앞당긴 것도, 파트로클로스의 관계를 단순화한 것도 결국 ‘신의 심판’ 대신 ‘인간이 저지른 일에 대한 인간의 대가’로 이야기를 재배치하려는 선택으로 읽을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원작이 갖고 있던 복잡한 인간관계와 도덕적 모호함이 상당 부분 다듬어져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트로이 전쟁,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트로이>는 정확히 트로이 함락과 함께 끝난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그 이후가 있다.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 험난한 여정이다.
앞서 다룬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가 바로 그 이야기인데,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트로이>와 정반대의 선택을 한 지점들이 있다는 점이다.
가령 <오디세이>에서는 메넬라오스가 원작 그대로 살아남아 스파르타에서 헬레네와 함께 딸의 결혼식을 치른다.
<트로이>가 지워버린 그의 생존을, <오디세이>는 그대로 되살려놓은 셈이다.
아가멤논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오디세이>는 아가멤논이 귀향한 뒤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살해당했다는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와, 오디세우스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자신의 귀향을 더 두려워하게 되는 장치로 쓴다.
<트로이>가 앞당겨 처리했던 그 죽음을, <오디세이>는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려놓은 것이다.
캐스팅에서도 흥미로운 대비가 있다. <트로이>의 헬레네(다이앤 크루거)는 ‘이 얼굴 때문에 전쟁이 났다’는 걸 관객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배역이라 전통적인 미인상에 가깝게 캐스팅됐다. 반면 <오디세이>는 루피타 뇽오를 헬레네와 클리타임네스트라 자매 1인 2역으로 캐스팅했는데, 애초에 이 영화가 헬레네의 미모를 전쟁의 원인으로 부각시키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선택이다. 같은 신화, 같은 인물을 두고 두 영화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가 캐스팅 하나에서도 갈린다.
전쟁의 스펙터클을 원한다면 <트로이>로, 그 전쟁이 한 인간에게 남긴 죄책감을 원한다면 <오디세이>로 이어보는 걸 추천한다.
총평
<트로이>는 학술적으로 충실한 각색은 아니다. 하지만 신을 걷어내고 인간의 야심과 자존심만으로 트로이 전쟁을 다시 짜보겠다는 방향성만큼은 뚜렷하다. 브래드 피트의 아킬레우스, 에릭 배나의 헥토르가 만들어내는 대비 — 영광을 좇는 전사와 가족을 지키려는 전사 — 가 이 영화의 진짜 중심이고, 그 대비만큼은 원작의 정서를 제법 잘 살려냈다.
자주 묻는 질문
Q. 트로이는 실화인가?
트로이 전쟁 자체가 역사적 사실인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튀르키예의 히사를리크 유적이 트로이로 추정되지만, 영화 속 사건들은 신화를 각색한 것이다.
Q. 감독판과 극장판 중 뭘 봐야 하나?
감독판(196분)이 헬레네와 파리스의 로맨스, 아킬레우스와 브리세이스의 관계에 개연성을 더 부여해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가 많다.
Q. 오디세이를 먼저 봐도 트로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나?
가능하다. <오디세이>도 트로이 목마 사건을 여러 차례 되짚어주기 때문에, 순서와 상관없이 두 영화를 각각 즐길 수 있다.
트로이 함락 이후, 오디세우스에게 남은 10년의 귀향길이 궁금하다면 아래 오디세이 결말 해석 리뷰에서 이어서 확인해보길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