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작가 <달려라 아비> : 결핍을 재치로 껴안은 명랑한 상상력

“내겐 아버지가 없다. 하지만 여기 없다는 것뿐이다. 아버지는 계속 뛰고 계신다.”

2005년에 출간된 김애란 작가의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는 가난, 청춘, 그리고 가족의 부재 같은 무겁고 눅눅한 키워드들을 전혀 새로운 문법으로 엮어낸 책이다.

총 9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된 이 단편집은 팍팍한 도시의 현실을 작가 특유의 명랑하고 통통 튀는 상상력으로 돌파해 내며, 출간되자마자 수많은 독자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오늘은 이 다채로운 단편집이 가진 뭉클한 매력과 함께, 책의 정체성을 가장 강렬하게 보여주는 표제작이자 첫 번째 단편인 「달려라, 아비」에 대한 감상을 먼저 깊이 있게 나누어 보려 한다. 그리고 이어서 책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단편들까지 간략히 소개해보겠다.

우리가 흔히 소설 속에서 ‘가난한 편모가정’이나 ‘무책임하게 도망친 아버지’라는 설정을 마주할 때 으레 짐작하는 감정선이 있을 것이다. 눈물, 원망, 그리고 깊은 자기 연민. 하지만 첫 단편인 「달려라, 아비」를 읽으며, 나는 내 뻔한 예상들이 아주 유쾌하게 빗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내게 찾아온 감정은 눅눅한 슬픔이 아닌 웃픈 웃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가장 비참할 수 있는 현실을 ‘상상력’이라는 무기로 방어하며, 기어코 자신의 존엄과 명랑함을 지켜내는 한 소녀의 이야기는 그 어떤 거창한 위로의 말보다 훨씬 더 단단하게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 듯했다.

달려라 아비 책 표지
출처: 교보문고

분홍색 야광 반바지를 입고 달리는 아버지

표제작 속 주인공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도망을 쳤다. “지금 당장 피임약을 사 와야만 한 이불을 덮겠다”는 어머니의 으름장에 신이 나서 약국으로 전력 질주를 했던 아버지는, 결국 피임에 실패해 덜컥 아이가 생겨버리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 그대로 집을 나가버린다. 평범한 딸이라면 이토록 무책임하게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증오하며 평생 마음의 병을 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인공이 이 상처를 대하는 방식은 내게 무척 기발하고 엉뚱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아버지가 미안해서 못 돌아오는 것이라 여기며, 분홍색 야광 반바지를 입고 앙상한 다리로 전 세계를 달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버지는 에펠탑을 지나고, 보르네오 섬을 거쳐 십수 년째 땀을 뻘뻘 흘리며 지구를 뛰고 있다.

가장 무책임하고 찌질한 존재를 우스꽝스러운 상상 속으로 끌어들여, 미움 대신 웃음으로 아버지를 소화해 내는 주인공의 방식이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불행을 거부하는 단단하고 유쾌한 모녀

이 소설을 읽으며 내내 마음이 갔던 또 다른 부분은 홀로 딸을 키워낸 어머니의 태도였다. 억척스럽게 생계를 책임지며 살아온 어머니는 가난과 불행을 전시하거나 딸에게 죄책감을 강요하지 않는 단단한 사람으로 보였다.

어느 날, 십수 년 만에 미국에서 죽었다는 아버지의 부고(訃告)가 영어로 날아든다. 미국으로 넘어가 재혼을 했지만 곧 이혼당했고, 전처의 정원에서 잔디 깎기를 하다가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죽었다는 찌질하고 좀스러운 소식. 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날, 어머니는 술에 취해 딸에게 이렇게 묻는다. “잘 썩고 있을까?”

눈물 콧물 쏟으며 통곡하는 대신 툭 던지는 저 건조하고도 농담 같은 한마디. 이들 모녀는 가난과 부재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서도, 결코 그것이 자신들의 삶을 우울하게 만들도록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상처를 농담으로 핑퐁 치듯 받아치는 그 단단한 맷집 앞에서는 그 어떤 비극도 함부로 기를 펴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선글라스를 씌워주는 마음, 상상력이라는 구원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내게 한국 문학에서 손꼽을 만큼 따뜻하고 아름다운 결말로 깊게 남았다.
주인공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죽어서 흙 속에 누워있을 아버지를 위해 마지막 상상을 한다.

여전히 캄캄한 땅속을 달리고 있을 아버지.
주인공은 그가 눈이 부시지 않도록 상상 속에서 아버지의 얼굴에 살며시 ‘선글라스’를 씌워준다.
자신을 낳기도 전에 도망쳐버린 아버지를 향한 원망을 넘어서서, 그의 초라한 삶을 조용히 안아주는 뭉클한 포용처럼 다가왔다.

책을 덮으며, 상상력이라는 것이 그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헛된 망상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고 미운 사람을 용서하게 만드는 아주 위대한 구원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걸 조용히 일러주는 듯했다.

또 다른 묘미: 놓치면 아쉬울 보석 같은 이야기들

단편집인 만큼, 표제작 외에도 2000년대 도시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짠내 나는 현실을 재기발랄하게 그려낸 다른 단편들을 골라 읽는 재미도 무척 쏠쏠했다. 책을 넘기며 개인적으로 특히 좋았던 수록작들을 조심스레 덧붙여 본다.

  • 「스카이 콩콩」: 「달려라, 아비」와는 또 다른, 무능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짠한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어릴 적 유행했던 ‘스카이 콩콩’을 향한 간절한 열망과 가난한 일상을 작가 특유의 통통 튀는 문체로 쫓아가다 보니, 내 가슴 한구석의 몽글몽글한 유년 시절 추억까지 덩달아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 「나는 편의점에 간다」: 퇴근길, 텅 빈 원룸에 들어가기 전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를 사 본 적 있는 ‘1인 가구’라면 누구나 깊이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매일 가는 편의점 알바생이 나를 알아볼까 봐 신경 쓰면서도, 동시에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묘한 외로움이 남 일 같지 않아 참 ‘웃프게’ 느껴졌다.
  • 「노크하지 않는 집」: 얇은 벽 하나를 두고 다닥다닥 붙어 사는 5명의 여자 이야기. 옆방 사람이 매일 밤 무슨 노래를 듣고 언제 샤워를 하는지 숨소리까지 다 알지만, 정작 얼굴은 절대 모르는 소름 돋는 현실을 기발하게 그렸다. 타인과 물리적으로 가깝게 뒤섞여 있지만 철저히 고립되어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서늘한 풍경에 흥미로웠던 단편이다.

가난과 상처에 지지 않을 명랑한 힘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우울하고 무거운 주제의 책은 읽기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뻔하고 가벼운 힐링 에세이에는 더 이상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 책이 꽤 반갑게 다가올 거라 생각한다. 상처를 대하는 가장 유쾌하고도 품위 있는 태도를 활자로 마주해 보고 싶은 분들께 조용히 이 책을 권해본다.

세상이 나에게 던진 불리한 조건들을 핑계 삼아 주저앉는 대신, 엉뚱한 농담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이 단단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당신의 지친 일상에도 기분 좋은 웃음과 위로가 되어주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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